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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민경배 교수의 한국 기독교회사에서

기순 2015. 3. 10. 21:04


어떤 의미에서 신사 참배 문제에 직면한 한국 교회는 최초의 대규모적인 충성의 분열을 뼈아프게 체험했다고 할 수 있었다. 숱한 순교와 교회 폐문의 시련이 있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국민의례를 명분으로 대거 참배 대열에 끼였고, 새 단체나 어용기관에 붙잡혀 왜경의 사주를 받는 이도 있었다. 성서적으로 참배가 정당하다는 궤변에 대항한 목숨을 건 항거가 있었던 반면에, 신사 참배 불응이 불경죄라고 위협하는 이도 있었다. 우리는 다 이들이 한국 교회의 한 ‘몸’이었다는 것을 비통한 심정으로 주목한다. 역사를 돌아보면서 이 세대의 교회를 나무랄 사람들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교회는 훌륭하게 그 시대에 할 수 있었던 일을 최선을 다해서 했었다고 보아야 옳다. 망명과 지하로 숨어 버린 교인의 경건이 찬양되면서 아울러, 그래도 모두 아픈 교회의 상처를 버리지 않고 한 세대가 허락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교회를 맡아나간 슬기를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교단의 운영을 맡았던 이들이나 폐쇄된 평양 신학교의 재건, 혹은 서울의 조선 신학교 설립을 서둘렀던 분들은 다 그들대로 심각한 형극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일부에서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하여, 자유주의파들은 친일했고, 보수주의에서는 이를 끝끝내 반대했다고 해서 이를 양 신학의 대결로 연결시키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보수신학의 거두 박형� 박사는 신사 참배를 한사코 반대하던 주기철 목사와 다투다가 일본에 잠깐 가 있었으며, 곧 신사 참배를 이미 하고 있었던 만주의 봉천 신학교로 옮겨 갔던 것이다. 또 이 신학교는 변성옥의 조선 기독교회를 비롯하여 다섯 교파를 망라해서 설립된 에큐메니칼 신학교였다. 보수계의 비에큐메니칼 선언의 합리성도 여기서 역리로 끝나고 만다.

 

박해의 단말마적인 불길은 맹위를 떨쳐 전국을 휩쓸었다. 해방이후에야 공지된 사실이지만 일본은 8월 18일을 기해서 여러 교파의 지도자(부역자 포함)들을 범주적으로 살해할 음모를 꾸며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흉악한 가시밭길에서도 교회는 “타도 타 버리지”않았다. 어두워지던 저녁은 찬양의 아침을 잉태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신앙의 결단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존속의 슬기로 버티어 온 교회, 그 참극의 막은 닫혀지고 있었다.

 

자료출처 : 민경배,「한국 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10쇄, pp. 510-511

출처 : Over The Arirang Hill
글쓴이 : 밝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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